은행 가계대출 잔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선 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저금리 기조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실물 서민 경제상황은 나아진 게 없지만 유동성이 풍부해지며 투자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에 몰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장 가계부채 부실 문제가 터질 정도로 불안한 상황은 아니지만, 향후 금리가 상승할 경우 가계는 물론 국가경제에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10일 한국은행의 ‘2021년 2월 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은행 가계대출은 잔액은 1003조1000억원이다. 한국은행 통계 작성 이래 은행 가계대출이 1000조원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1000조원이라는 숫자 자체도 그렇지만, 더 우려스러운 것은 가파른 빚 증가속도다. 2월 한 달만 놓고 보면 가계대출 증가폭은 6조7000억원으로 지난 1월(7조6000억원)에 비해 줄어들었다. 하지만 좀 더 긴 시계열로 보면, 빚 증가 추이는 가팔라진다.

은행 가계대출 잔액은 2015년 7월 600조원을 넘어섰고, 2016년 11월 700조원을 넘어설 때까지 1년4개월이 걸렸다. 이후 잔액이 800조원이 되는 데 1년9개월, 900조원이 되는 데 18개월이 소요됐다. 여기서 다시 잔액이 1000조원을 넘는 데는 딱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 한 해는 부동산 투자 열기가 뜨거웠다. 정부가 각종 부동산 대책을 내놨지만, 아파트 매매거래량은 오히려 늘어나며 △지난해 9월 5만4000가구 △10월 7만2000가구 △11월 9만4000가구 △12월 8만7000가구가 거래됐다. 아파트 거래량이 늘고 가격도 급등하며 가계대출도 함께 늘었다. 올해 1월 들어서는 6만2000가구로 거래량이 감소했지만, 그간 전셋값이 동반 상승하며 주택과 관련한 가계의 부담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빚을 내 주식에 투자하는 ‘빚투’ 현상도 불붙었다. 이에 따라 신용대출이 급증하는 현상을 빚었다. 지난해 연중 신용대출을 포함한 기타 대출은 전년(15조1000억원)보다 두배 이상 많은 32조4000억원 늘어났다.

2월 대출 증가폭이 1월보다 감소한 점은 다행스럽지만, 이를 장기적인 가계대출 감소 추세로 판단하기는 이르다. 2월 신용대출이 줄어든 것은 주식시장이 횡보장을 보이는 것과 함께 기업의 성과급과 떡값 지급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부동산 시장 열기는 다소 식었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일탈로 인해 향후 상황을 예측하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주택 매매시장이 안정된다고 해도 전셋값 부담은 여전하다.

가파른 가계대출 증가세에도 저금리와 정부 금융지원 정책 덕에 당장 큰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월 신용대출을 포함한 기타 가계대출 연체율은 0.37%로 전월 말보다 0.04%포인트 올랐다. 하지만 1년 전보다는 0.1%포인트 낮은 수준이고, 주택담보대출 연체율(0.14%)은 전월 말 수준을 유지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보통 연체율은 연체채권 상각·매각이 집중되는 분기 말에 조금 떨어졌다가 분기 초인 그다음 달에 오르는 경향이 있다”며 “분기 초여서 소폭 올랐을 뿐 하락 추세는 지속될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대출 1000조원 넘은 게 당장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저금리에 정부가 유동성 공급을 하고 있어 향후에도 빚이 증가할 것으로 본다”면서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금리 올리는 타이밍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대출 총량을 막고 있음에도 가계대출이 증가하는 것은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면서 “최근 들어 자산가격이 상승하면서 대출이 급증하는 모양새인데, 만약 자산가격이 하락하게 되면 더욱 우려스러운 상황이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 교수는 자산가격이 하락하고 가계 부담이 커지게 되면 국가 경제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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